내장산에서 백암산으로 넘어가며 절정의 가을 정취에 마냥 젖어들다
오를수록 내장산은 산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란 게 있다면
그러한 걸 대다수 갖추었단 생각이 들게 한다.
오르며 두루 살필수록 강인한 생명력, 찬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아름다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춘 백양春 白羊 추 내장秋 內藏,
백암산 백양사 일대는 봄이 일품이고 내장산은 가을이 아름답다고 해서 이런 말이 나왔으리라. 하나의 국립공원 내에 있으면서도 계절에 따라 확연히 도드라지는 풍광을 추켜세운 표현이다.
또 백암산은 겨울 설경도 뛰어나 내장산 가을 단풍, 금산사 봄 벚꽃, 여름 변산반도의 녹음과 함께 호남 4경에 속하니 일일이 계절에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을 찾는 건 많은 산행 계획표 중에도 앞줄에 놓여있다.
내장산은 주봉인 신선봉을 중심으로 연지봉, 까치봉, 장군봉, 연자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 월령봉의 아홉 봉우리가 말발굽형으로 둘러서 있으며 봉우리들 사이로 골이 깊고, 곳곳 기암절벽들이 저마다 개성 강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리산, 월출산, 천관산, 능가산(내변산)과 함께 내장산을 호남 5산으로 추렸다.
무공해 단풍 열차에 몸을 실어
가을은 잎이 꽃이 되는 시절이다. 붉게 물든 가을 산하에서 뜨겁게 데었던 화상을 치료하고 마음의 위안도 받게 되는데 내장산에서 특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중추 절정의 내장산은 입구부터 붉은 단풍과 탐스러운 감나무가 호남의 대표적 가을 산이자 명실상부한 단풍 명소임을 드러낸다. 불 지펴 활활 타오르는 선홍빛 단풍은 오는 손님들을 입구부터 맞이하고 바위 봉우리들은 저만치 물러서서 다감하게 미소 짓는다. 단풍 숲으로 들어서노라면 잠시 새색시에게 다가서는 새신랑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장산에는 내장 단풍, 아기단풍, 털 참 단풍 등 다양한 단풍나무가 서식하는 데다 일조시간이 길어 특히 그 빛깔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건 역시 초록이다. 활활 타오르는 단풍과 늘 차디차고 푸른 비자나무는 환상적인 조화로움을 자아내 내장산의 가을을 돋보이게 한다.
사랑채 지나 육간 대청에 올라 대가大家의 넉넉한 풍모를 느끼고 안채에 이르러 그 집안의 지적 내력에 감탄하며 비로소 겸허히 고개 숙인다고 했던가.
안으로 또 안으로 스며들수록 이 산은 깊이 감춰두었던 감동들, 고이 간직했던 탄성의 순간들을 하나씩 둘씩 꺼내 놓는다. 그 안에 숨겨졌던 비경, 감춰두었던 보물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내장산內藏山이라 부르는 것이다.
역시 숲길과 계곡, 깎아 빚은 절벽에서 눈길 돌리면 바람, 물 그리고 공기의 흐름에서도 낭랑한 새 울음을 듣게 된다. 내장산 진면목 실감의 서막이다.
내장산 무공해 단풍 열차에 몸을 실어 찬찬히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으로 명산에 걸맞은 풍광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해금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형상의 봉우리와 계곡에는 야생화와 무성한 나무들이 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고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보통 내장산은 찬연히 물든 가을 만산홍엽의 장관을 으뜸으로 내세우지만 앞서 표현한 것처럼 안으로 들어가 속속 들여다보는 내면의 모습도 감칠맛 나는 볼거리이다.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고장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전라북도 정읍시에 소재하여 순창군과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는 내장산은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1971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시장에 가계신가요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문학박사 박병채 교수가 현대어로 풀이한 정읍사의 구절이다. 내장사 진입로 자연보호 헌장 비가 세워진 자리에 망부석이 세워져 있었다.
행상을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산에 올라가 두 손을 마주 잡고 백제가요 정읍사를 부르는 부인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든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 망부석이 세워진 내장산 잔디밭에서 결혼하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이곳에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많았다. 1986년 말 정읍사공원으로 망부석이 옮겨지면서 백년해로의 장소인 야외 예식장은 수목들을 심어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내장사 일주문 우측으로 접어들어 백련암을 거쳐 비자나무 집단 자생지를 지나고 원적암, 단풍터널에서 일주문으로 돌아오는 약 3.6㎞의 등산로에 자연학습 탐방로가 개설됨으로써 자연보호는 물론 수목에 대한 지식을 높이는 데 일조하였다.
불자는 아니지만, 내장사를 슬그머니 지나칠 수는 없다. 백팔번뇌라는 숫자의 의미 때문이겠지. 일주문에서 내장사까지 붉게 물든 108그루의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며 어우러졌다. 이 터널에 들어서는 순간 속세에서 아등바등 비틀린 삶에 찌들던 이들도 그 영혼을 위로받을 것만 같다.
내장사 경내에 발을 들여놓자 병풍처럼 혹은 말발굽처럼 이어진 봉우리들이 캔버스 펼쳐 원근감 살린 붓질을 하고프게 만든다.
논밭 고르는 농기구 써레발의 모양이라 그렇게 부른다는 서래봉을 중심으로 내장산 연봉들의 기운을 듬뿍 받은 내장사도 속세에서 상처 받은 신도들의 심신을 다독이기에 충분히 아늑하고 그윽하다.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에 창건된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조선 역사를 지켜낸 유서 깊은 용굴과 벽련암, 약사암, 운문암 등 역사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전국 4대 사고史庫에 보관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멸실되었다.
유일본인 전주사고 실록을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보존하였는데 그 실록 보존 장소인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에 이르는 길을 조성하여 조선왕조실록길이라 명명했다.
지난밤 비는 멎고 궁문처럼 열린 하늘
내장산 단풍들은 불이라도 난 같은데
갈바람 퍼득이니 주홍 물이 떨어진다
치고 오르는 고도가 제법 까칠하다. 산바람 스미는데도 깔딱 오르막에 땀방울이 솟는다. 전망대에 올라 장군봉, 월영봉, 서래봉 등 내장산 환 종주 코스를 시선에 담는다. 서래봉 아래 백련암의 위치가 명당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멋진 풍광이란 생각이 들게 하니 말이다.
갈색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느티나무들이 뒤섞여 울긋불긋 완벽하게 계절을 채색하였다. 케이블카 상단을 지나 연자봉까지도 야무진 행로가 이어진다.
해발 675m 연자봉에 올랐을 땐 호흡까지 거칠어진다. 가파르기가 북한산 백운동암문 오름길 못지않다. 내장사작은 기와지붕을 내려다보니 그 가파름이 힘들 수밖에 없게끔 느껴진다.
풍수지리상 연자봉을 중심으로 장군봉과 신선봉이 마치 날개 펼친 제비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표지판에 적혀있다. 제비의 한쪽 날개 신선봉을 곧게 바라보고는 그리로 길을 간다. 편편한 능선이 이어지다가 신선봉 갈림길에서 한차례 고도를 높인다.
주봉인 신선봉神仙峰(해발 763m)의 정상석 고인돌 앞에서 인증사진을 박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숨을 고른다. 불출봉과 서래봉의 결 미끈한 능선에 눈길 머무르며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 공기가 신선하다.
북설악 신선봉과 계룡산 신선봉 등 우리나라 산에는 같은 이름의 봉우리들이 숱하게 많다. 신선이 머물고 싶을 만큼 경관이 수려한 산에 이 이름을 붙였을 터. 내장산 또한 구름을 타고 가던 신선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려서서 둘러보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백암산 아래 투명 연못에는 가을 정취가 철철
다음 봉우리 까치봉까지 1.5km. 지체하지 않고 그리 진행한다. 바위 지대와 헬기장을 지나 백암산으로 가는 삼거리에 이른다.
300m 거리의 까치봉을 외면하고 백암산으로 빠지는 건 왠지 새치기하는 기분이 든다. 암릉을 지나 까치 날개
모습의 두 개 바위에 다다르니 여기가 까치봉이다. 많은 이들이 맘껏 전망을 즐기고 있다.
곧 이어지게 될 소둥근재와 순창 새재의 갈색 능선을 눈에 담고는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여기부터는 인적 없는 홀로 산행이다. 오색 낙엽 무성한 융단 길 소둥근재에서 오르막을 치고 올라 닿은 순창 새재도 가을이 낮게 바닥을 포착한 모습이다.
백암산白巖山 정상 상왕봉(해발 741m)에서 다시 땀을 닦아낸다. 전북 순창군과 전남 장성군의 경계에 있는 백암산은 전통사찰 백양사와 다양한 불교 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는 백양사 지구와 입암산성을 중심으로 문화재가 분포된 남창지구로 구분하는데 입암산笠巖山(해발 626m)과 함께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정상에서 아늑하고 완만하게 펼쳐지며 고인 골에 시선을 담갔다가 아래 전망 바위에서 사자봉과 백학봉을 바라본다. 학이 고고하게 날개 펼친 모습으로 뛰어난 암봉미를 보이며 준수하게 솟은 백학봉 쪽으로 진행한다.
암릉 지대를 우회하고 더 걸으면 앉은뱅이 명품 소나무를 감상하게 된다.
파라솔처럼 혹은 천막처럼 한껏 제 몸을 기울여 가지 밑에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잘 익은 벼를 연상하게 한다. 익을수록, 명예를 지닐수록 겸허해지는, 좀처럼 지켜내기 어려운 교훈을 떠올리게 된다. 명성에 급급한 이가 명예까지 얻는다면 그게 과연 가당한 일일까.
“한 수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낮게 허리 굽힌 소나무에 눈인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겨 해발 651m의 백학봉에 도착한다. 이름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었다. 학바위에서 하산 지점 백양사를 내려다본다. 가을 풍광에 물씬 젖어 영천 굴, 약사암을 지나다가 올려다본 학바위는 그 위에 서 있을 때와 달리 깎아지른 절벽이다.
백양사 도착, 경내를 둘러보고 사진으로만 접했던 가을 쌍계루를 직접 보자 감회가 새롭다. 학바위를 등에이고 색동 치마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투명 연못에는 가을 정취가 철철 넘치는 중이다.
“저는 지은 죗값으로 천상에서 축생의 벌을 받았는데 스님의 설법을 듣고 극락 환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 백학봉에서 내려온 한 마리 흰 양이 같이 설법을 듣고 스님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면서 절을 올리더란다. 다음 날 마당에 흰 양이 죽어있었다는 설화에서 백양사의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
백양사에서 다시 올려다본 백암산은 역시 의연하고도 멋진 자태를 보여준다. 어느 겨울, 시간을 내어 다시 올 땐 백양사를 기점으로 해서 백암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을 다진다.
때 / 가을
곳 / 내장산 매표소 - 내장사 - 전망대 - 연자봉 – 신선 삼거리 - 신선봉 - 금선폭포 – 까치봉 삼거리 - 까치봉 – 까치봉 삼거리 - 소둥근재 - 순창 새재 - 상왕봉 - 백학봉 - 약사암 - 백양사
https://www.youtube.com/watch?v=wFTk9DLY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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