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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고궁_ 덕수궁 돌담길에 가려진 궁궐의 발자취

장한림 2022. 11. 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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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로서의 존재보다 그 돌담길이 훨씬 큰 관심사인 가을 덕수궁에서 역사의 흔적을 더듬고 또 돌담길의 정취도 재삼 느껴본다

산에서 역사를 읽다

얼마 전 갤럽은 우리나라 국민의 취미 생활 중 으뜸이 등산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주말이나 휴일, 도봉산 역이나 수락산 역에 내리면 그 결과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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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이 되면 더더욱 돌담길이 정겹게 느껴지나 보다. 가을 돌담길 중에서도 덕수궁 돌담길은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서울 한 복판에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덕수궁 돌담길은 가을 풍광에 매료된 이들이 다시 찾곤 하는 곳이었다.

덕수궁 전경과 세종로 일대


예전부터 지금까지 덕수궁의 존재감보다 돌담길이 더 서울시민의 인식에 와닿았던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조선 5대 궁궐 중 덕수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비해 그 존재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던 건지 함 알아보기로 하자. 물론 이 포스팅을 다 읽었을 때라야 대강이나마 알게 되겠지만.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로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시청 옆에 소재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조선 14대 왕 선조가 도읍인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조선 9대 왕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게 그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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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5대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공사관


1895년 발발한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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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해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일부 서양 건축양식의 건물을 포함해 많은 건축물들을 세우면서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제대로 갖추게 된다. 당시 궁의 정문이던 대안문大安門도 보수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였다.

중국 고대 역사를 통해 익히는 고사숙어의 지혜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고사숙어 혹은 사자성어는 대개 한자문화권 국가인 중국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공자, 맹자 등 제자백가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춘추전국시대부터 소설 초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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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 세종대로

홍교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구획된 도성을 덕수궁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경희궁과 연결하는 다리인 홍교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1904년 큰 화재를 겪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조선 말엽 덕수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칭하였다.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고종 재위 말년 10여 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자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 씨가 인수당에서 숨을 거두었고 황태자비 민 씨도 석어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덕수궁 건물들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중화문과 중화전을 둘러 있던 2칸 폭의 행각도 헐려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그 후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에 관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 한국위원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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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이때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피신하여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가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 파괴를 제지함으로써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포화에 잿더미가 되었을 덕수궁을 보존케 한 감사의 뜻으로 해밀턴 딜에게 정식으로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후 1963년 1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된 덕수궁은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1988년 경희궁지 발굴 작업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창덕궁과 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차차 복원되기 시작했고, 2010년부터 덕수궁도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다만 덕수궁은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다. 4단계로 예정된 덕수궁 복원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주한 미국 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과 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어려움이 있는 실정이다.


또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권역 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있는 구세군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주한 영국대사관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합의점을 도출해야 하는 게 현실상 문제점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덕수궁 완전 복원의 길은 험하고도 멀기만 하다.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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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덕수궁의 가을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다. 특히 덕수궁 돌담길은 물씬 가을 정취를 풍기며 연인들을 비롯해 많은 인파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미적 공간이다.


2022년 10월 22일부터 11월 19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하루 두 차례씩 숭례문의 건축적인 아름다움과 의미에 대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는 숭례문 무료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회당 35분가량 소요되며, 사전 예약 없이 현장에서 바로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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