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의 흐름 따라 가령산, 낙영산, 도명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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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철쭉과 갓 피어난 야생초들이
물기까지 머금어 초롱초롱하고 싱그럽다.
아직 채 걷히지 않고 엷게 흐르는 운무가
조용한 산중에 적막감을 덜어준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화양동 소금강이라고도 일컫는 화양천이 있다. 가령산과 도명산의 북쪽 골짜기에서 달천과 이어지는 화양계곡 입구까지 약 4km의 계류가 흐르는 곳을 일컫는다. 화양계곡, 화양동천, 화양구곡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같은 곳이다.
7km 떨어진 선유동계곡과 함께 속리산 북쪽의 수려하고도 맑은 하천으로 1975년 화양동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1984년에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으며, 2014년에는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회양목의 다른 명칭인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이라 불리다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광진구 화양동 아홉 개의 계곡에 이름을 붙여 화양구곡이라 하였다.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이 그것인데 대개 구곡九曲이라 함은 아홉이라는 숫자가 던지는 실상보다 굽이치는 계류가 많다는 의미의 상징성이 강하다. 쌍곡구곡, 선유구곡, 풍계구곡, 갈은구곡, 연화구곡, 고산구곡 등 괴산에 있는 구곡들이 그러하다.
특히 화양구곡은 넓고 깨끗한 암반과 맑은 하천,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목들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어서 한번 다녀가면 눈에 아른거려 다시 찾고 싶어 안달이 나는 곳이다. 그러한 화양구곡을 둘러싸고 있는 세 산,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충북 괴산의 35 명산에 꼽히는 가령산, 낙영산, 도명산을 찾아왔다.
화양 옥류의 긴 흐름 딛고 오르는 가령산
창문으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봄볕이 얼른 몸 일으켜 세워 훌쩍 떠나라 한다. 이것저것 재다가 그대로 머리를 파묻으면 후회할 것만 같아 벌떡 일어나 서둘러 채비를 한다.
충북 자연학습관에 도착하여 길옆에 주차했을 때가 아침 9시, 오는 듯 마는 듯 주저하던 빗방울도 말끔하게 그쳤고 구름을 거둬내며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봄볕 받은 화양천 물살이 은빛으로 일렁인다. 약간 불어난 듯한 화양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 등산 진입로부터는 바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길이 축축하고 미끄럽다. 오르다 보면 올망졸망 작은 바위들이 인사하고 또 오르면 더 큰 바위들이 길을 터준다. 커다란 바위 사이로 늘어뜨린 줄을 잡고 오르자 시계가 환하게 열리는 조망처가 나온다.
굽이도는 화양계곡이 마치 지리산에서 섬진강의 흐름을 내려다볼 때를 떠올리게 한다. 섬진 청류만큼이나 화양 옥류의 긴 흐름도 감성을 자극하고 풍류를 느끼게 한다.
화양계곡의 물 흐름 따라 눈길을 띄우다 보면 자그마한 다리 하나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학소대가 있다. 오늘 산행의 최종 하산 지점이 된다.
오르면서 왼편에 도명산이 뾰족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데 상당히 먼 길처럼 느껴진다. 또 올라 넓게 펼쳐진 바위에서 운해에 반쯤 가려진 조항산과 청화산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철쭉과 갓 피어난 야생초들이 물기까지 머금어 초롱초롱하고 싱그럽다. 아직 채 걷히지 않고 엷게 흐르는 운무가 조용한 산중에 적막감을 덜어준다.
가령산 명물이라고 들은 거북바위를 곁에서 보니 그럴 만큼 개성을 지녔다. 거북바위 왼편으로 툭 튀어나와 어딘가를 가리키는 듯한 부속 바위도 기이하다.
오르다 커다란 바위가 나오면 거긴 멋진 조망 장소이다. 사방이 훤하게 트인 데다 산들바람까지 불어주어 상큼한 기분을 지니게 한다. 아래 자연학습관이 마당까지 보이고 그 너머로 사랑산과 오른쪽 뒤로 군자산이 낯설지 않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대야산과 둔덕산 바위 봉우리들이 친근하게 다가선다.
암릉의 밧줄을 붙들고 바위 사이를 오가다가 헬기장을 지나 가령산加嶺山 정상(해발 642m)에 이른다. 백악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이웃한 도명산, 낙영산과 함께 화양동계곡을 삼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가령산은 괴산군 청천면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 굴참나무로 뒤덮여 조망이 없어 덩그러니 세워진 정상석에 눈만 맞추고 내려서는 일밖에 달리 머물 명분이 없다.
“혹여 기회 닿는다면…….”
더 인사말을 늘어뜨린다면 거짓말이 될 것 같아 등을 돌린다. 다시 올 수 없을 거로 생각하는 산정에서 등 돌리는 경험은 대개 씁쓸한 이별처럼 싸한 느낌이 들게 한다. 내가 산정에, 혹은 산정이 내게 이별을 고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조경목 전람장을 둘러보는 듯하다
가령산에서 낙영산까지는 내려섰다 올라가기를 반복하는데 조망이 없어 다소 답답하기도 하지만 살짝 운무 낀 숲길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라는 실체가 연출해내는 분위기는 산에서 일 때 가장 오묘하고, 가장 요염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을 걷다가 연리목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연리목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달아나려는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붙드는 형상인데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상대에게 끈질긴 집착을 보이는 모습이다.
“제발 억지 결합이 아니길.”
떨어져 있어야 마땅한 두 사물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억지 관계를 맺고 결합한 게 아니기를 바라며 연리지에 시선을 꽂은 채 걸음을 멈춘다.
정치권력과 재벌의 그릇된 연결고리, 돈과 폭력의 이해타산이 걸린 엮임. 대자연에 그런 너저분한 유착 관계가 있을 리 없는데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 바로 지척이라 괜한 노파심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 하늘이 열리자 백악산 너머로 속리산 주 능선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멀지 않은 봉우리들은 옅은 안개마저 거의 걷어냈다.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서 길게 숨을 내뱉고 숲에 가렸다가 탁 트인 공간에서 숨을 들이마시며 무영봉(해발 742m)에 닿았다.
국립지리원 지도에서는 이곳을 낙영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망 가려진 무영봉을 벗어나면 급격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곳곳에 설치된 밧줄은 깔끔하고 튼튼하다. 매듭도 튼실하게 매었다. 이쪽에도 멋진 소나무들이 널찍하게 늘어섰다.
가파른 암릉을 밧줄에 의지하여 범바위 안부로 내려선다. 상당히 커다란 범바위는 사람 얼굴의 옆모습을 닮은 형태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마늘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이르자 피식 실소를 머금게 된다.
곧이어 더 시원하게 시야가 트이더니 노송과 어우러진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겪었을 아름드리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비바람과 눈보라에 피부가 깎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검버섯 바위가 어우러져 연륜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낙영산으로 가는 길은 바위와 소나무를 주제로 한 조경목 전람장을 둘러보는 듯하다.
전람장을 빠져나오면 바로 낙영산落影山(해발 684m)이다. 장쾌하게 펼쳐진 백두대간 주 능선과 속리산 연봉들이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준다.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산답게 산자락 곳곳에 동물 형상의 바위들이 수두룩하고 암릉의 묘미와 쾌적한 조망을 한껏 즐기게 해 준다.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의미의 낙영산은 당 고조의 세숫물에 비친 아름다운 산에서 그 유래를 짓고 있다. 당 고조는 신하를 불러 세숫물 속의 산을 그리게 한 후 이 산을 찾도록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찾지 못하다가 동자승이 동방국 신라에 있는 산이라 알려줘 신라로 사신을 보내 찾게 하여 낙영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남의 나라 산 이름을 지들 멋대로 짓다니.”
국립지리원 지도와 산행 안내판의 표식을 종합해보면 무영봉이 낙영산의 최고봉이며 정상석이 있는 이곳은 낙영산의 지봉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 추측이 맞는다면 당나라 사신이 신라까지 출장 와서 번지수를 헛짚은 거였다.
낙영산 684m 봉에서 내려와 좌측 공림사로 빠지는 갈림길인 절고개 안부에서 올려다보면 가파르게 내려왔다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낙영산을 산행하려면 보통 공림사를 기점으로 잡는다. 공림사 왼쪽 계곡의 등산로를 따라 이곳 능선 안부 사거리를 통해 총 한 시간 이내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도명산으로 향한다.
도명산에서 학소대로
절고개에서 도명산으로 가는 길은 산책로처럼 아늑하다. 등산로 옆으로 산성 흔적이 보이는가 싶더니 미륵산성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고려 때 축성한 둘레 5.1km의 방어용 산성으로 산 이름을 따서 도명산성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안내판에 적힌 전설이 애틋하다.
홀어머니를 서로 모시려던 남매가 있었는데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하고, 딸은 성을 쌓아 먼저 끝내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기로 하여 남매성이라고도 부른단다. 누가 모셨을까. 궁금해하다가 이내 생각이 바뀐다.
“요즘이라면 유산을 걸고 내기를 했을 텐데.”
다시 길을 가다 시선을 끌어당겨 고개를 돌렸는데 열차처럼 웅장한 바위가 길게 누워있다. 수락산 기차바위가 몸을 눕힌 모습인데 역시 기차바위라고 부른단다. 도명산 오르는 길목까지 많은 나뭇가지로 떠받친 바위를 포함해 기묘한 바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도명산道明山 정상까지 200m를 올라갔다가 돌아 내려와야 한다. 정상까지 급경사의 통나무 계단이 이어져 있다. 속리산 국립공원 도명산 정상(해발 642m)에 이르러서야 몇 명의 등산객을 만났다.
학소대에서 올라와 낙영산을 거쳐 가령산으로 향하는 이들이다. 도명산은 괴산군 청천면 공림사와 화양동계곡 학소대에서 올라올 수 있다.
산 아래 채운암이라는 암자에서 도를 통한 이가 나왔다고 이름 지어졌다는 도명산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바위가 모여 정상을 이루고 있는데 주변에 분재처럼 자란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준다.
시야를 넓히면 오른쪽으로 조봉산부터 왼쪽으로 낙영산과 걸어온 능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로 속리산 주 능선이 펼쳐졌다. 전면으로 군자산과 칠보산이 보이고 뒤편으로 대야산도 조망된다.
도명산 정상석 뒤의 돌 봉우리까지 올라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삼거리에서 학소대로 하산로를 잡는다. 조금 내려가 거대한 바위 사이를 지나면 세 분의 부처가 친히 마중을 나와 있다. ㄱ자로 꺾어진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새긴 도명산 마애삼존불상이다. 도명산 9부 능선으로 낙양사가 있었다던 낙양사 터이다.
도명산 제1 경승지로 꼽히는 삼존불상은 오른쪽 불상부터 각각 9.1m, 14m, 5.4m로 높고 웅장하며 선각이 희미하게 보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올라가서 새겼을지 의구심을 지니는데 세 부처가 입을 모아 가르침을 준다.
“부디 네가 사는 곳을 떠나서 이상 세계를 찾지 말거라.”
더 증폭된 의구심을 안고 다시 경사 급한 계단과 비탈진 너덜 길을 내려서서 학소대 다리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 돌아보면 화양구곡 중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가 보인다.
백학이 집을 짓고 새끼를 쳤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였는데 바위 위로 뻗은 노송들과 그 아래로 흐르는 맑은 계류가 어딘지 모르게 서로를 돌보는 듯 느껴지게 한다.
학소대에서 처음의 산행기점이자 주차장소인 자연학습관까지 약 2.5km를 걸어 이곳의 명승들을 살펴본다. 주자의 ‘무이도가’ 중 무이구곡의 제9곡을 읊은 한 구절을 떠올리는데 봄이 움트는 화양천의 물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린다.
“별천지는 모름지기 인간 세상 속에 있거늘.”
때 / 초봄
곳 / 충북 자연학습관 - 가령산 - 무영봉 - 낙영산 - 도명산 - 학소대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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