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곳으로 분류된 세계문화유산 경주 역사유적지구 중 대능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 대능원지구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 23m에 이르는 황남대총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 고분군(대능원),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 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 왕비 및 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 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 무덤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경주역사유적지구 -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위대한 문화유산, 문화재청)]
신라의 왕과 왕족들이 잠들어 있는 대릉원지구에는 금관, 천마도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토기들이 이곳에서 출토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분 중에 특이한 형태의 부장물이 출토되면 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천마총은 천마도가 출토된 고분이다. 천마도는 마구馬具의 일종인 장니에 그려진 그림으로 하늘을 나는 말의 형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마총 금관은 높이 32.5cm, 지름 20cm로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금관으로 1978년 12월 7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신라의 명성을 만방에 떨치다, 황룡사지구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버려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m²,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년)에 대종을 주조하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 창건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 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80여 m 규모의 9층 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m 높이의 장륙존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9층 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분황사 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 경주역사유적지구 -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위대한 문화유산, 문화재청)]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 선덕여왕 재위 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나 몽고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황룡사에는 신라 3보의 하나로 1장 6척(약 4.8m) 크기의 불상인 장륙상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보다 더 크면 대불大佛이라고 하며, 1.8m 정도의 불상은 등신불等身佛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금당金堂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솔거가 황룡사 금당벽화를 그렸다.
황룡사지구 안에는 지금까지 분황사석탑(국보 30호)이 남아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분황사의 석탑은 벽돌처럼 석재를 다듬어 쌓았기 때문에 모전석탑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시대의 유일한 석탑이다. 분황사석탑을 제외하면 모두 통일신라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 외곽을 방어하라, 산성지구
경주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기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이 많은데, 산성 가운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경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활산(해발 266m)에 쌓은 명활산성이다.
경주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당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475년 자비왕이 거주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성벽을 쌓았는데 이는 신라 초기의 축조 방식이다..
경주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천 년을 유지해온 흔치 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온 역사도시로서 오늘날의 현대 도시로 이어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경주의 이와 같은 역사성, 문화성은 도저히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한국문화의 원형이 탄생된 공간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경주에 감탄하며 열광하는 이유 또한 경주를 고대와 현대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명품 도시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근거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 경주역사유적지구 -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위대한 문화유산, 문화재청)]
산성지구는 경주 외곽에 세워져 수도를 방어하던 곳으로 명활산성明活山城(사적 47호)이 이곳에 있다. 명활산성은 약 6km의 길이로 세워진 산성으로 초기 신라의 축성술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명활산에 있는 명활산성은 신라 때 왜구를 막기 위하여 돌로 축성한 것으로, 둘레가 6km에 이른다. 우리나라 사적으로 사적의 정식 명칭은 ‘경주 명활성’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In25kg2MFI
https://www.youtube.com/watch?v=i6ClcoCfa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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