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대, 서석대 등 남한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는 무등산 단풍길, 증심사에서 원효사까지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인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화순군, 담양군으로 이어져 있다. 북쪽의 나주평야와 남쪽 남령 산지의 경계에 있는 웅장한 산으로,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25년 만인 2013년에 스물한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질 생태학적으로, 또 관광 측면에서 경탄할만한 풍경과 신비로움이 깃든 천혜의 절경지여서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크고 고귀한 산이라는 의미에도 딱 부합하는 무등산이다.
광주는 먼저 5·18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하고, 무등산無等山은 민주주의 수호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광주시민들에게는 더더욱 눈길만 스쳐도 가슴 저린 실체일 것이다. 무등산 또한 현대사의 질곡을 직접 지켜보며 천추의 한을 곱씹는 중일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방문하면서 가슴이 울렁이는 건 지금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규봉에서 보았던 가을 풍광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오늘은 코스가 틀리지만, 여기가 무등산이기에 바쁘게 서둘러 움직여도 보여줄 걸 다 보여줄 것으로 확신한다.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이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다
아웃도어 상설매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등산진입로부터 무등산은 한껏 물들어 있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증심사는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불교 도량으로 삼층석탑, 범종각, 오백전 등 많은 문화재가 있어 1986년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사찰이다.
증심사와 증심교를 지나 중머리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다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인 약사암을 지나면서 본격 등산로가 시작된다. 약사암 위로 수직 절벽인 새인봉 마루가 보인다. 바윗덩어리 정상부가 임금의 옥새와 흡사하다 하여 이름 지어진 봉우리이다.
새인봉 삼거리에서 잠시 망설인다. 거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새인봉은 400m 지점에서 한 번 더 쳐다보는 것에 만족하고 중머리재로 좌회전을 튼다.
낙엽 수북하게 덮인 돌길과 잡목 숲길을 길게 올라 능선에 이르자 억새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아래로 마당 널찍한 중머리재가 보이고 그 위로 통신소에 통신 철탑들이 늘어서 있다. 양지바른 드넓은 평야에 사방이 탁 트인 중머리재 공터에서 많은 등산객이 식사도 하고 휴식도 취하는 중이다.
중머리재 약수터에서 물만 보충하고 내처 용추 삼거리를 거쳐 장불재(해발 990m)에 다다른다. 광주광역시와 화순군 경계 선상의 넓고 평평한 고원지대인 장불재에 이르자 과연 상대 비교를 하고자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웅대한 산세이긴 하지만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고 안정감 있는 흙산이라 마냥 푸근하다. 장불재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입석대(해발 1017m)이다.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각에서 6각 혹은 7각, 8각형으로 된 돌기둥이 둘러서 있다.
꼿꼿하게 몸 일으켜 세운 바위들은 마치 한 곳을 응시하며 사열 받는 군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약 7000만 년 전 안산암에 형성된 주상절리로서 기둥 하나의 둘레가 보통 6~7m, 10m 내외의 높이로서 남한에서는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이다.
주상절리柱狀節理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또는 다각형인 기둥 모양으로 화산암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뜨거운 용암이 냉각되어 부피가 감소하면서 그 수축 작용으로 형성된 지형으로 온도가 높고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이 빠르게 냉각될 때 잘 발달한다고 한다.
유네스코에서는 지질학적·생태적·역사적·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세계적으로 보호·관리하는 공원을 세계 지질공원으로 인증하여 등재하고 있다.
2018년에는 제주도와 청송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음으로써 광주시민의 어머니 품으로 존재하던 무등산은 일약 국민의 산으로 거듭났고, 나아가 세계적 보존 가치를 지닌 인류의 산으로 우뚝 섰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입석대의 우람하고도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에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다가 승천암이라 적힌 바위를 지나 서석대(해발 1100m)에 이른다.
저녁노을 물들 때면 햇빛에 반사되어 수정처럼 빛나기 때문에 수정 병풍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칭했던 것은 이 서석대의 돌 경치에서 연유한 것으로 서석대의 병풍바위는 맑은 날 광주 시내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무등산 3대 석경인 서석대, 입석대와 광석대의 무등산 주상절리대 10만 7800㎡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감은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지월당 김극기는 고려가 망한 뒤에 세상일을 잊고자 이름난 산수를 찾아 시를 지으며 소일했다. 그는 자신의 시 ‘규봉암’을 통해 무등산 규봉의 경이로움을 저처럼 표했다.
규봉을 가보지 않고는 무등산을 논하지 말라고도 한다. 장불재에서 서면 쪽으로 능선을 따라 약 1km를 돌아가면 지공 너덜과 규봉 주상절리(해발 950m)에 이른다.
지공 너덜은 수많은 돌이 흩어져있는 비탈로 주상절리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에 깨어져 능선을 타고 모여진 산물이며, 인도 승려인 지공 대사가 석실을 만들고 좌선 수도라면서 그 법력으로 억 만개의 돌을 깔았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규봉은 광석대, 송하대, 풍혈대, 장추대, 청학대, 송광대, 능엄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등 열 개의 대에 이름을 붙였는데 무등산 주상절리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며, 하늘과 맞닿을 듯 깎아지른 100여 개 돌기둥 사이의 울창한 수림과 규봉암 사찰이 조화를 이루며 잘 어울린다. 특히 울긋불긋한 단풍이 수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가을이면 그 풍광에 눈을 떼지 못한다.
미사일 기지와 막사 등 군사 시설물들 위로 솟은 봉우리 셋이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라고 지칭되는 무등산 정상이다.
정상부에서 쭉 둘러보노라니 바위에 새긴 글처럼 광주의 기상이 무등산에서 발원된 건 공감할만하다. 임진왜란 때 김덕령 장군을 비롯한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대한제국 때에도 의병활동의 거점이 되었었다. 무등산이 광주와 전남도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카리스마 넘치는 광활한 풍광에 여지없이 압도되면서도 하늘과 접한 공원처럼 시원하고도 푸근하다. 서석대 전망대에서 본 서석대 역시 강인한 위용을 뽐낸다.
잘 다듬어진 오솔길을 따라 편안한 걸음걸이로 중봉에 닿았다. 그리고 다시 용추봉에 이르렀다. 널찍한 바위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 두루두루 시선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시계를 보고는 얼른 일어선다. 원효사로의 하산길이 짧은 길이 아니다.
가을 무등산은 노을이 지면서 더욱 붉어지고 있다
노을빛에 젖어 더욱 붉어진 가을 모습을 보여주는 백운암 터를 지나고 토끼등을 지난다. 날머리 원효사까지 3.2km, 길은 평탄한 데다 노랑, 주홍 낙엽 밟으며 느긋하게 걷다보니 창창하던 한낮 태양에 등 돌린 채 항명하듯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
바람재를 거쳐 공군부대 앞길을 지나자 낙엽도, 무등산도 그리고 광주도 황혼과 함께 더욱 붉은 모습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있다.
수줍어 살포시 미소 띠며 외지 나그네 맞아준 만추 단풍과 호방하게 펼쳐진 산정의 광활함이 삐죽 모나기까지 했던 지난 한주의 삶을 부끄럽게 만든다.
행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법. 어느 순간 평화에 금이 가고 위급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면에서 산을 삶과 비견했었다. 변화가 있고 반복이 거듭하니 생의 소중한 가치를 망각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한복판에서 머리에 담고 가슴에 지녀 무겁기만 했던 건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걱정 부스러기요, 스트레스 조각에 불과했었다는 것이 정녕 깨우침이라면 산과 금맥을 동일시했던 친구의 말은 딱 들어맞는 거였다. 그렇게 자답하고 자책하고 자각하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해 떨어져 어둑어둑 거무스레한 산비탈 흐릿하게라도 길 남겼다가 원효사 버스 종점까지 온전하게 내려주고 나서야 홀연 어둠에 몸 가리니 무등산 배려가 하염없이 살갑기만 하더라.
때 /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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