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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여행 4_ 미륵대원지

장한림 2023. 1. 23.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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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대원, 1000년 잠에서 깨다. 옛 절터에 서린 미륵의 바람, 충주 미륵대원지

 

 

충주 수안보에서 남쪽 미륵리로 방향을 잡으면 월악산 남서쪽 자락이 나오고 그 언저리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하늘재 초입에 충주 미륵대원지가 산 증인처럼 자리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땅속에 묻혀 잊혔던 역사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의 미륵대원이 적혀있다. 마을 사람들이 미륵댕이라 부르던 논밭이자 주거지였던 곳, 1976년에 사적 317호인 충주 미륵대원지 절터의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석물이 나왔다. 미륵대원이 10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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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대원지는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지며 발굴되었다. 1차 발굴에서 ‘명창 3년 대원사 주지 승원명明昌三年大院寺住持僧元明이라 적힌 기와가 발굴되면서 사찰 이름이 대원사라는 게 밝혀졌다.

 

 

 

4차 발굴 때는 동쪽 언덕에서 원이나 역지驛址, 군사시설로 볼 수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사찰인 대원사와 관리들의 숙소 격인 미륵대원이 유기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구획뿐인 경계를 넘어 북향으로 길쭉하게 절터가 자리한다. 왼쪽에 낮은 언덕이 있고 오른쪽으로 인공하천이 지나는데 그 중심에 오층석탑(보물 95)과 석등(충북 유형문화재 19), 석조여래입상(보물 96)이 일렬로 축을 이루며 서있다. 부러진 채 누운 당간지주는 발굴 전까지 동네 미자 할머니네 장독대로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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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비석 받침돌로 쓰였을 귀부(충북 유형문화재 269)가 나타난다. 미륵대원지 귀부는 오롯한 거북의 머리이다. 전국에서 손꼽을 만한 규모이다. 원래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조각해 만들었는데 앞으로 내민 오른발과 발가락만 살짝 보이는 왼발의 모양새가 특이하다. 몸에 새긴 또 다른 부조도 흥미로운데 왼쪽 어깨 주름 아래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어미의 등으로 기어오르고 있다.

 

 

 

귀부 뒤로는 석탑과 석등이 뒤를 잇는다. 오층석탑은 절터의 중심이다. 땅 깊숙이 뿌리내린 하부 기단은 자연석이라는 견해가 있고, 석탑과 일직선에 있는 석등과 석조여래입상 역시 자연석기단 위에 들어섰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석등은 팔각석등과 왼쪽의 사각석등(충북 유형문화재 315)이 있다.

 

 

 

미륵대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유물인 석조여래입상은 다시 기단 3단을 지나 마주한다. 높이 10.6m 불상은 경주의 석굴암과 흡사하다. 삼면이 석실로 둘러싼 불상은 가로 9.8m에 세로 10.75m 크기로 높이 6m의 석축을 둘렀다. 땅을 파고 돌을 쌓아 조성한 형상이다. 감실에는 부조한 불상 흔적이 증거처럼 남았다.

 

 

 

석불 뒤에는 물길을 들여 제습효과를 도모한 흔적이 있고 바닥은 정교하다. 석축은 불상의 어깨 높이까지 쌓아 완전한 석굴로 보기는 어렵다. 그 위로 목조 지붕을 이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지난 2004년에는 땀 흘리는 석불로 화제를 모았다.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되었는데, 한동안 석불의 왼쪽 눈 위만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모방송사에서 이틀간 촬영했다. 물기는 서서히 사라졌으나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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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이 북쪽을 바라보는 절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마의태자가 서라벌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그만한 세력과 경제력을 지니지 못했을 터인데 미륵불인 석조여래입상이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세운 북쪽 덕주사의 마애불과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미륵불에 더한 신라인의 바람이 담긴 설화라고 여겨진다.

 

 

 

고려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신흥국가의 염원을 담았다고도 한다. 인근 마을의 고구려식 지명 상모리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지세에 따라 주봉 월악산을 보고 북향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의도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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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개칭하기 전까지 중원은 충주의 옛 지명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9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이라 했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웅이 할거하는 격전장으로 종종 등장한다. 충주는 삼국시대에도, 통일신라를 지나 후삼국 때도 가장 첨예한 전장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 또한 거기에서 기원할 것이다.

 

 

 

미륵대원은 사찰의 창건 시기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략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 태조와 혼인한 충주 유 씨 집안에서 창건·불사했다고 본다. 미륵불은 불교의 부처 가운데 말세에 중생을 구제하러 온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부처이다.

 

 

 

석조여래입상 앞에는 그 증거처럼 염원이 서린 바위가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날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바위이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을 돌릴 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고, 쌀알이 부서지면 딸을 낳았다고 전한다. 화강암 바위의 손바닥만 한 머리 부분은 많은 이들의 바람이 더해져 반질반질하게 닳아 윤기가 난다.

<참조문헌 : 충주문화관광 ‘충주 미륵대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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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대원지는 충주 공용버스터미널 인근 농업기술센터 정류장에서 245, 246(단월·수안보) 버스를 타고 미륵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여기서 충주 미륵대원지 입구까지 400m 거리이다.

자가운전을 하여 오게 되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IC로 빠져나와 3번국도 충주·수안보 방면의 월악산 교차로에서 좌회전하고, 750m 안보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미륵송계로 따라 8.7km 직진한 후 오른쪽 미륵리 사지길로 진입하면 된다.

 

 

 

문의 및 안내

TEL. 043-850-6723(충주시청 관광과)

 

주소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사지길 150

 

 

https://www.youtube.com/watch?v=Jt4uaDsuw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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