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9.
- 오정태 전무는 내게서 탁한 적색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가치를 느끼는 그 무엇이 있을까. 내가 그에게서 진정 얻고자 하는 건 도대체 뭘까.
햇살이 창창한데도 하늘색이 잿빛으로 무겁게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낮아진 하늘이 현주의 머리를 짓누른다. 현주는 그동안 깊이 인식해보지 않았던 의문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김현주! 기분 풀어. 대화 소재가 너무 무거웠나 보다.”
정후는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유연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사실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있기보다 훨씬 어렵기는 했다. 더 일찍 현주 본인의 이야기였음을 파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흘깃 조수석을 쳐다보았는데 차창에 비친 현주의 뺨에 한줄기 눈물 자국이 보인다. 정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젠장! 이게 무슨 경우람. 여직원을 울리다니.
정후는 쉼터에 차를 정차시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이럴 땐 어떡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시키지.
시동을 껐다.
“우는 거야?”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살피려 했는데 현주가 홱, 몸을 돌린다. 정후는 당혹스러웠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내는 현주의 옆모습을 보고 안 됐다고 느끼면서도 정후는 문득 울기까지 해야 하는 슬픔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내 말에 서운했으면 사과할게. 한 번만 봐주라.”
정후는 몸을 돌려 손바닥을 비비면서 현주를 달랬다. 그제야 현주는 쑥스러운 듯 몸을 돌려 정후의 어깨를 밀어 자세를 바로잡게 했다. 멋쩍게 웃는 정후의 표정이 푸근하면서도 아이 같다고 느껴졌다. 신중하지 못한 처신으로 그를 난감하게 만들고 말았다. 본의는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로 그를 기만한 것 같아 현주는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 왜 정태와의 질펀한 섹스를 자책하면서 고향의 엄마가 생각났을까. 뒤이어 친구들과 입사 동기들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였을까.
가까이하고 싶었는데 많이 멀어져 버린 사람들과의 날들이 아련히 떠오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따뜻한 미소를 짓고 정겹게 손을 내밀고 있는데 나 자신은 죄스러워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질척한 비밀에 들러붙어 껄끄럽게 깔린 죄의식 탓이었다. 정후가 눈치채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 눈물을 삼키려 했는데 그만 들켜버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제가 철없이 굴었어요.”
현주는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미소를 흘렸다.
“아니야. 내가 조심성 없이 입을 놀린 것 같아. 난 조금 가깝다 싶으면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버릇이 있거든.”
정후는 제 입술을 비틀며 불과 한 시간 전쯤 현주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현주가 미소를 머금으며 표정을 풀었다.
“가까워진 것 같아요? 저랑?”
“나만 그런 생각인가?”
“저도 그래요. 후후후!”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정후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현주는 손거울을 빼 들어 얼굴 가까이에 댔다.
- 이 사람을 만난 곳이 회사가 아니었다면… 마음 한구석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불안 따윈 없었을 텐데.
현주는 자꾸만 그가 끄는 야릇한 자력에 쇳조각처럼 마냥 끌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일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현주는 훨씬 더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정태 전무가 예약한 K호텔에 먼저 도착한 현주는 샤워하면서도 내내 정후를 떠올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짧은 동행이었지만 그에 대해 많은 걸 느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안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실상 궁금해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이나 웃음으로 비켜 갔다. 두서없이 정후를 더듬는데 그 틈바구니로 오 전무가 파고든다.
눈을 감았는데 복잡한 선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가는 다시 엉켜버린다.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든 제우스가 인생의 모든 죄악이 담긴 상자를 판도라에게 주었으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바람에 모든 불행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모든 불행이 세상으로 빠져나갔으나 그 상자에 희망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주는 막연히 예정된 운명처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그 자리에서 그 상자가 열리는 걸 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짙게 들어찬 감정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대로 진행되어온 것 같다.
태화물산에의 입사, 그 회사의 전무와 가까워지게 된 일, 그리고 다시 이정후 차장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는 현상들. 현주는 이러한 현실이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이어져 온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 정태를 기다리면서도 마치 정후가 들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착각이, 그런 바람이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그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불행한 현실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여명은 짙은 어둠을 뚫고 지나올 수밖에 없다. 어둠을 걷어내고 밝아오는 새벽처럼 이미 강하게 들러붙은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현주, 많이 달라진 거 같아.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
정태는 나름대로 격한 정사를 치르고 나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태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도통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정태와의 섹스가 무미건조할 만큼 자극이 되지 않았는데 스스로도 확연한 변화에 놀라고 말았다.
- 여자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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