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공포가 얹힌 혹한의 설산 등반
광덕산이란 이름의 산은 충남 천안, 경북 김천, 전남 화순 등 10여 개에 이른다. 산의 명칭이 겹칠 정도로 우리나라엔 많은 산이 있어 넉넉하고 가보지 않은 미답지의 산이 더더욱 많아 또 행복하다.
38선 북방 10km 지점에 자리한 광덕산은 인근 명성산, 화악산, 석룡산처럼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으로 역시 6·25 한국전쟁 당시 전선이며 지금도 최전방의 산 중 한 곳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덕의 기운이 있어 광덕廣德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겨울에 그 이름값을 하는 산이다.
한북정맥의 일부 노선인 회목봉과 상해봉, 광덕산의 고도 1000m가 넘는 설산 세 봉우리를 가는 게 어쩌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먹고 다시 찾은 광덕산에서 재작년처럼 광덕산과 상해봉만 다녀오기엔 왠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쌓인 눈이 잘 다져진 듯해서 길만 잘 찾아가면 무탈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험산, 혹한에 혼자라는 건 외로움에 공포가 얹힌 느낌 경기도 포천에서 강원도 화천을 넘나드는 광덕고개 비탈 아래에 커다란 반달곰이 두 도의 경계임을 알리고 있다.
이 고개는 캬라멜고개로 불리기도 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급경사 광덕고개를 지날 때면 지휘관이 차량 운전병들에게 졸지 말라고 캬라멜을 주었다고 해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는 일화가 있다.
또 굽이굽이 돌아가는 광덕고개가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미군들이 낙타의 캐멀camel을 발음한 것인데 음이 비슷한 캬라멜로 변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높이 1000m가 넘는 산이지만 바로 여기 620m 고도에 있는 광덕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많은 산객이 여기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조경철 천문대로 향하는데 그들과 반대편 오른쪽으로 꺾어 산장 가든을 끼고 올라간다.
등산로는 또렷하다고 들었는데 아뿔싸, 눈이 길을 죄다 덮어 이리저리 헤매며 발자국만 숱하게 만들어놓았다. 암석과 눈밭뿐인 오르막에서 간신히 길을 찾으니 지나온 광덕고개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이다.
“후유, 총 한 번 쏴보지 못하고 후퇴할 뻔했네.”
여름이면 꽤 울창한 숲길일 듯싶다. 한여름 제철 맞으면 우거진 활엽수들이 더위는 막아주겠지만 지금처럼 조망이 트이지는 않을 것이다. 햇빛 드는 평탄한 눈길에 양옆으로 낙엽송들만 무뚝뚝하게 늘어섰을 뿐 이정표도 없고 눈 밟는 소리 외엔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왜지?”
홀로 산행 때마다 숱하게 겪은 감정이고 감상이지만 오늘은 더 도드라지게 고요에 빠져든다. 너무나 고요하여 고독이란 놈이 꿈틀거릴라치면 걸음이 빨라진다.
감투봉(해발 907m), 표지석도 없고 안내판도 없다. 다녀간 이가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리본을 보고야 여기가 거긴가 여기게 된다.
오른쪽으로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곳에 하얗게 덮인 바위 봉우리 상해봉이 보이고 능선 왼쪽으로 광덕산 기상레이더 기지와 둥그런 축구공 모양의 천문대가 보인다.
간간이 낙엽 삐져나온 양지 눈길을 걸어 숨 고르려 커다란 바위 위에 올랐는데 낯익은 산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응봉부터 화악산, 석룡산, 명지산으로 이어져 국망봉까지 어깨를 맞춘 가평의 고산 준봉들이 희끗희끗한 겨울 차림으로 손짓한다.
“여긴 언제 또 오려는가? 다녀간 지 꽤 되지 않았던가?”
“내년 여름엔 꼭 가겠습니다.
명지계곡의 세찬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무락골 바위 타고 넘치는 계류가 눈에 선하다. 이들과 조우하고 내려선 바위가 투구바위봉이라는 건 다녀와서야 알게 된다. 화천 군수님께 민원이라도 올려야 할까 보다. 이정표를 세우는 적은 노력이 지역 방문객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려드려야겠다.
언제 보아도 한북정맥의 수더분하게 긴 라인은 안기고픈 마음이 일게 만든다. 성삼재에서 바래봉으로 길게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 능선처럼 살갑고 푸근하다. 그처럼 푸근한 공간에서 눈길 돌려 몇 걸음 나아가자 갑자기 살벌한 공간이 나타난다.
능선 곳곳에 삽이며 곡괭이로 파헤친 흔적이 보이고 여기저기 나무가 베어져 있다. 치열한 전쟁터였음을 알게 하는 6·25 전사자 발굴 현장이다.
거길 벗어나자마자 그중 하나가 회목봉일 거라 짐작되는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이 보이고 그 뒤로 복주산이 소복 차림으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서 있다.
역시 봉우리 일대에 다다라서야 회목봉을 찾을 수 있었다. 무더기로 쌓인 바위 더미를 기어 올라갔는데 정상 표지도 없고 반겨주는 인사말도 없다. 썰렁한 바람이 일지만, 여기가 회목봉 정상(해발 1027m)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상에서 보는 다른 정상들이 가까워 보인다. 회목봉에서 두루 둘러보지만 드넓은 공간은 흰 색상에 드문드문 도드라진 검정 덧칠이 전부이다.
겨울 산행은 온통 하양이라 거기 함정이 도사리기 일쑤다. 가파르게 내려가 다시 가파르게 고도를 올린다는 건 조금만 주의력을 떨어뜨려도 낙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바위 눈길에서의 낙상은 충돌로 이어지는 미끄럼의 시작이기 때문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회목현으로의 내리막은 급경사의 빙판길이다. 아이젠을 찼어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820m 고도의 회목현 임도까지 겨우 200m 내외의 길을 내려왔는데도 발목이 시큰하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도로 모퉁이에 잠시 걸터앉아 목을 축인다.
따뜻했던 녹차는 진작 살얼음 뜬 냉수로 변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널찍한 공터에 이르자 벌거벗은 나목 사이로 지척에 우뚝 솟은 상해봉이 햇살 받아 영롱한 빛을 발한다. 상고대가 피었음이다. 작년 겨울 월악산 영봉에서 보았던 찬란한 은빛 상고대, 오늘 그걸 보려나 모르겠다. 고독이 밀고 상고대가 당기니 다시 잰걸음이 된다.
상해봉은 평탄한 능선 지대에 거대한 암봉이 볼록 솟은 형상이다. 수직 가까운 암벽에 밧줄이 늘어졌는데 장갑을 꼈어도 손이 시릴 것만 같다.
암벽도 무척 미끄러워 보인다. 이번에도 전신에 힘이 들어간다. 겨울 냉한 암벽보다 더 무서운 건 지금 혼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처음 접하는 험한 지형에서 혼자라는 외로움에 공포가 얹힌다. 자꾸 극한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찬바람을 폐부 깊숙이 집어넣으니 조금이나마 속이 가라앉는다.
밧줄에 체중을 싣고 밧줄이 묶인 나무를 붙들고 다시 또 그렇게 오르자 상해봉上海峰 정상(해발 1010m)이다.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암벽 일부에 고드름이 달려있고 노송군락은 상고대가 투명하게 반짝인다.
금세 마음이 아늑해진다. 정상은 오른 자에게 내어주고 상고대는 보고자 하는 이에게 더욱 투명하게 비친다. 다소간의 무모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여느 산객과 마찬가지로 열정의 승리라고 자부하며 쟁취한 정상의 행복감을 맛본다.
명성산과 각흘산 뒤로 금학산, 고대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철원평야 지대도 한가롭다.
화악산과 명지산 일대는 역광을 받아 눈이 부시다. 성탄절이면 크리스마스트리를 점등하는 군사분계선 내 대성산에서 복주산과 막 거쳐 온 회목봉까지 최전방 한북정맥의 스카이라인이 하얗게 선을 잇고 있다.
매력의 여운 강하게 남은 설빙 산행
사방 눈이 닿는 곳마다 눈길 주다가 다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로에 이르러서야 막 엄청난 곳을 다녀온 기분이 드는 거였다. 누군가를 만나고 왔는데 함께 있었을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헤어진 다음에야 강한 매력을 느껴 자꾸 떠올렸던 경험이 있었는가.
상해봉이 그랬다. 첫인상보다 훨씬 도드라진 매력을 느끼게 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다시 이곳을 산행한다면 그건 필시 상해봉 그대 때문일 겁니다.”
명칭의 유래처럼 망망대해에 떠 있는 암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동병상련의 고독을 앓는 동지애도 느끼게 되며 어딘지 모르게 도전적인 위상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오시게나. 언제든 팔 벌려 안아줄 테니.”
상해봉에서 도로까지 내려오면 여기가 1000m 고지의 산이라는 생각이 지워질 정도로 평탄하고 넓은 고원지대의 연속이다. 광덕산 정상부의 천문대에는 차량이 올라와 주차되어 있다. 아폴로 박사로 불리던 조경철 박사가 건설에 참여해 화천 조경철 천문대라고 명명했다.
천문대 주변에서의 조망이 기막히다. 거쳐 온 회목봉과 상해봉에서 지금 서 있는 광덕산을 지나 백운산과 아래로 국망봉, 강씨봉, 운악산 등 한북정맥이 끝없이 이어진다. 눈이 덮였거나 눈이 녹아 하나같이 단조로운 흑백공간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13개 정맥 중 하나인 한북정맥은 북한지역 추가령에서 남서로 뻗어 내려오다 오성산을 지나 휴전선 이남의 적근산과 대성산으로 이어져 여기 광덕산을 통과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이다.
보통 한북정맥 종주란 대성산 이남의 수피령에서 파주 교하의 장명산까지 도상거리 165km에 이르는 산행을 일컫는다. 광덕산은 그 한북정맥에서 갈라지는 여러 지맥 중 한 곳인 명성지맥을 뻗는 분기점이다. 즉 이 산에서 명성지맥에 속한 박달봉, 각흘산, 명성산 등으로 갈 수 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잘 지냈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넨 자주 오는 편이야.”
광덕산 정상석(해발 1046m)은 천문대에서 조금 떨어져 세워져 있다. 광덕산 기상청인 레이더 기지를 보고 계획했던 대로 자등현 쪽 하산로를 택한다. 이정표상 백운계곡 주차장 방향이다.
박달봉으로 갈라지는 830m 고지 광산골 갈림길에 걸터앉아 등산화를 벗어 눈을 털어낸다. 잠시 등산로를 벗어났다가 신발 가득 눈이 들어가고 말았다. 앉은 김에 식은 커피도 마저 마시고 일어난다.
너럭바위 옆 헬기장을 지나자 좁고 비탈이 심한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또 한 번 초긴장 순간을 넘기게 된다. 충분히 숨을 고른 후 폐타이어 적재지역, 벙커 지역, 다시 헬기장과 교통호를 지나 임도에 이르면서 겨우 눈밭을 벗어난다.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포천의 경계에 있는 고개, 47번 국도상의 자등현(해발 450m)에 도착하면서 설빙 산행을 마치게 된다. 각흘산과 명성산을 가면서 방문했던 자등현인지라 이곳 또한 친근감이 든다.
자등현에서 광덕산을 올려다보니 쌓인 눈 때문에 산자락 선이 더욱 뚜렷하여 낙타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각흘산이 말갛게 미소 지으며 수고했노라고 덕담을 건네준다.
때 / 겨울
곳 / 광덕고개 - 감투봉 - 회목봉 - 상해봉 - 조경철 천문대 - 광덕산 - 큰골 – 자등현
https://www.youtube.com/watch?v=VVXtWusRA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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