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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에 도드라지는 신여성들의 강렬한 삶과 애환

장한림 2022. 3. 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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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에 도드라지는 신여성들의 강렬한 삶과 애환

<덕숭산 -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소재하여 덕산 도립공원에 속한 덕숭산德崇山은 수덕산이라고도 불린다. 1973년에 지정된 덕산 도립공원은 호서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지는 덕숭산을 비롯하여 원효봉, 석문봉, 해태바위 등이 있고 폭포와 아름다운 계곡들이 그 암봉들과 어우러져 있다.

차령산맥 줄기로 높지는 않으나 옹골찬 산세를 지닌 덕숭산은 울창한 숲 뒤로 계곡을 끼고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안면도와 서해가 한 폭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이곳에는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널리 알려진 수덕사修德寺가 있다.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계룡산의 동학사, 청도 운문사에 견주는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건립 연도가 명확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발견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더 오래된 건물이지만 수덕사 대웅전은 제작연도가 명확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국보나 보물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지정 순서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건조물, 서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재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고고 자료 등을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보물로 지정하며,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 중에서도 시대를 대표하거나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으뜸인 것을 지정한 것이다.   

 

        

다시는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거라.” 

 

절절한 사연이 깃든 수덕여관을 둘러본다

 

주차장에서 식당과 매점이 늘어선 상가를 지나다 보면 이 지역이 관광지로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곳이란 느낌을 받는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은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의 덕숭산 자락을 찾아들었다. 거기에 동갑내기이자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자는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수덕사를 찾아가 친구인 김일엽처럼 여승이 되기를 자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옛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으로 이 화백이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89년 작고할 때까지 머물렀다. 원형을 복원하여 각종 문화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수덕여관을 둘러보며 수덕사 큰스님인 만공선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은 70여 년 전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을 한 여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랐던 나혜석은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이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 뒤 다른 남자와의 염문으로 이혼을 당한 나혜석은 ‘순결과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는 이른바 정조 취미론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유 연애론을 주장한 대표적 여성이자 여권 신장을 위한 여성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을 나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라고 적힌 일주문을 지난다. 총림이란 선원, 강원(승가대학 또는 승가대학원), 율원(율학승가대학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 종사인 방장의 지도로 정진하는 종합 수행도량을 말한다.

승주 송광사의 조계총림, 합천 해인사의 해인총림, 양산 통도사의 고불총림과 함께 예산 수덕사의 덕숭총림이 국내 4대 총림에 해당한다. 

이 일주문을 지나면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건 엄청나게 굵은 기둥 때문이다. 네 개의 기둥은 이제까지 보아온 일주문 기둥 중 가장 굵은 것 같다. 여길 빠져나오니 잘 단장된 길이 놓여있다. 분홍의 꽃무릇이 소담하게 핀 걸 보고 덕숭산 수덕사라 적힌 또 하나의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

 

본명이 김원주인 일엽 스님(1896~1971)은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 최초의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910년 일본 유학,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시대상에 맞선 자유연애,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난 후의 출가와 수행.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당대의 여걸이라 하겠다.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여승이 되었으니 세상의 상식적 틀은 일엽 스님에겐 안중에도 없었나 보다. 

1927년 조선일보에 실린 김일엽의 '나의 정조관'은 당시로선 가히 파격적이었다. 조선 여성들이 한 남자의 노리개로 팔리는 모욕적인 착오에서 깨어나야 하고 수동적 무능의 존재에서 벗어나 남녀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는 것은 물론 인격자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을 집안에만 꽁꽁 가두려 했던 봉건적 남성 세계에 그녀의 대범한 외침이 울리게 된 것이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일엽은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마저 벌이를 나가고 나면 어린 몸으로 갓난 동생들을 돌보았으나 부모와 동생들을 모두 잃는 극심한 슬픔을 겪으며 17살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1896년생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20세기 초반 신여성 출신의 작가로서 문학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열정적인 필체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은 김일엽은 문학보다 개인적 스캔들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시련이 거듭되는 굴곡진 삶 중에서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앞장섰던 여걸로 평가되며 참담한 운명을 스스로 극복했던 강렬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훗날 일본 유학에 나선 일엽은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는 아버지를 은행 총재로 둔 일본 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슈 제국대 학생이었다. 오다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은 그녀는 현해탄을 건너 귀국한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일엽은 1920년, 여성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여 1933년 불교에 귀의할 때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16편의 소설, 35편의 시, 4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첫 남편과 이혼한 김일엽은 규슈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오다 세이조와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고 임신을 하였으나 오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좌절되고 홀로 아들을 낳았다.  

오다 세이조와 김일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김태신, 바로 김천 직지사의 일당 스님이다. 김태신은 해방 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지금도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다고 한다. 당시 그 일로 인해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속세에서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 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니 다시는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거라.” 

 

수덕사를 찾아온 어린 아들 김태신은 보고 싶었던 어머니로부터 모자의 정이 끊기는 모진 외면을 받게 된다. 이때 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어머니처럼 김태신을 돌보며 그림을 가르쳤다. 출가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도를 터득한 나혜석으로 인식되는 단면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가리고 차별하는 것만 꺼린다면.' 至道無難 唯嫌揀擇(지도무난 유혐간택)

 

승찬 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서의 가르침에서도 나혜석의 처세를 비견하게 된다. 친구의 아들을 거리낌 없이 내 아들처럼 키우고 가르쳤던 그녀 역시 당대의 여걸답다는 느낌을 지니게 한다. 

아들을 외면한 수덕사의 여승, 일엽 스님은 우리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비구니였다. 유행가 ‘수덕사의 여승’ 탓에 수덕사는 한동안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기도 했었다. 일엽 스님이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였다면 그녀의 선사적 면모는 진작 빛을 발했을 것이다. 많은 언론지에서 그녀는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으로 평가해왔다. 

송춘희의 출세곡이자 평생 대표곡인 수덕사의 여승을 흥얼거리며 수덕사를 빠져나가 대웅전 왼편의 담장을 끼고 덕숭산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른다. 경내에 세워진 이정표에 정상까지 1.91km라고 표시되어 있다. 

사방에 약사불, 아이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새긴 사면 석불을 보게 되는데 백제 때의 유일한 사면불을 그대로 재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으로 된 등산로 오른쪽 절벽 끄트머리에 소림 초당의 단아한 초가지붕이 보인다. 선불교의 만공스님이 참선하던 곳인데 오르는 데 급급하면 그냥 지나치고 만다.

경내를 지나 여기까지 오르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정혜사 등 수행처가 있는 데다 바람까지 멎어 괜히 숨소리마저 죽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적막하기까지 하여 더욱 운치 있는 우거진 숲길을 산책하듯 걷다가 1020 계단을 오르면 또다시 불교의 흔적을 보게 되는데 바위벽에 세워진 미륵불 입상이다.

그리고 육각의 지대석 위에 올려놓은 원형의 굄돌인 만공탑과 마주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만공스님의 사상과 불교적 업적을 기리고자 1947년에 세운 석탑이다. 

만공탑에서 세계일화의 의미를 새겨본다

 

사라질 뻔 버려질 뻔 휘청거리다가도 

다시 지탱하고 있잖아.

세상에 단 한 번 절실한 쓸모거리 되지 못하고 

스러질 뻔 했다가도 

지금 두 발 디디고 서 있잖아.

뒤뚱거려 무어 더 바라며 

무어 더 지니려 하겠나.

살아가며 감사하는 게 행복인 줄 알며 살았잖아.

그러면 됐지, 뭐!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한 대선사 만공 스님은 김일엽을 불교계를 이끌었다. 김일엽은 이혼 이후 수덕사에 머물면서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 준비를 하며 수도승이 되면서 완전히 속세를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신여성의 삶은 불심에 의해 구원받게 되었던 모양이다.   

만공스님의 일화를 하나 더 짚고 가기로 하자. 일본 총독에게 일침을 가한 일화 등 만공스님의 수많은 얘깃거리 중에 청산리대첩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과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공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막역했다. 

 

“두 분은 정신적으로도 강인하셨지만, 힘도 장사였지요.”

 

덕숭총림의 수좌 설정 스님이 두 사람의 일화를 전한다.

 

“오늘은 힘 한번 겨뤄보시지요.” 

“소승이 무슨 힘이 있겠소.” 

 

교자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가 장군이 먼저 앉은자리에서 상을 뛰어넘었다. 스님은 “대단하시네요.”라고 칭찬했다.

 

“스님도 한번 해보세요.” 

 

사양하던 스님은 가부좌인 채로 몸을 날려 장군 뒤에 가서 앉는 것이었다. 또 다른 힘겨룸은 팔씨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는데 일어나 보니 두 사람이 앉은자리의 방 구들장이 꺼져있었다.

 

“힘을 겨루었다기보다는 두 분의 친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설정 스님은 두 사람을 회상하며 그렇게 말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탑에 새긴 글귀인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의미로 조국 해방의 소식을 접한 만공스님이 길가의 무궁화 꽃을 따서 썼다고 한다. 

해방되어 모두 하나가 되길 기원한 만공스님의 뜻과 달리 서로 다른 이념에 의해 작은 나라가 지금까지 둘로 쪼개진 현실이 답답했나 보다. 불현듯 치킨게임이란 게 떠오른다.

한밤중, 도로 양편에 승용차 두 대가 마주 서서 헤드라이트를 켠다. 그러더니 곧바로 차를 돌진시킨다. 두 대의 차는 금세 정면충돌 직전에 이른다. 

과연 그 차들은 그대로 충돌할 것인가. 이른바 치킨 게임chicken game. 1950년대 미국의 젊은 터프가이들 간에 유행하던 자동차 게임의 명칭이다. 핸들을 꺾지 않음으로써 앞차와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상대의 차를 피해 목숨을 구할 것인가. 

전자를 택하면 두 사람 모두 승자로서의 명예를 얻게 되지만 그 명예는 죽음 혹은 치명적인 중상과 맞바꾼 승리이다. 후자를 택해 목숨을 유지하면 불명예스러운 겁쟁이, 즉 치킨으로 취급당하게 된다.

서로 간에 어느 한쪽도 양보함이 없이 극단상황으로 치닫는 이 용어는 동서 이데올로기가 팽배할 무렵인 우리나라의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에 걸쳐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 등 지구 상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극심한 군사 경쟁상황을 꼬집으며 국제정치학 용어로 굳어졌다. 

오늘날에서도 정치뿐 아니라 경제 강국 혹은 대기업의 독점적 우위를 점하려는 이기적 경제 행보 등 극단적 경쟁으로 치닫는 상황을 비유할 때도 치킨게임이라는 용어는 종종 인용되고 있다.

세계 일화는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 스님의 희망 사항에 그치고 말았다. 나 자신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너와 나, 이 나라 저 나라까지 하나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다시 한번 원형의 만공탑을 눈여겨보고는 다시 올라 스님들이 수행한다는 향운각을 지난다. 중턱의 채소밭을 지나면서 바위에 밧줄로 울타리를 친 등산로에 접어든다. 수덕 저수지에서 올라오는 주 능선 삼거리에 닿게 되고 여기서 조금 더 걸어 덕숭산 정상(해발 495m)에 올라서게 된다. 산정이 높지는 않아도 내려다보니 주차장과 수덕사가 아득하다. 

서서히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나무숲 건너로 야트막하게 가야산이 보이고 아담하게 정돈된 전답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잡목 너머로 용봉산, 수암산, 오서산을 가늠하고 멀리 서해안 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안면도와 천수만은 희미하다. 여기서 수덕사를 내려다보니 당대의 신여성들이 출연한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수덕사에서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당대의 여장부들, 큰스님들이 주연이 되고 조연으로 등장하여 걸쭉한 자취를 남긴 수덕사, 그리고 덕숭산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사, 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따라 운명이 바뀌거나 고정되거나 하는 게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등산 코스만으로는 짧은 덕숭산이지만 수덕사와 충의사 등의 사찰 방문을 겸한 산행이나 인근에 덕산온천이 있어 온천산행을 겸한 가족들의 나들이 탐방 장소로 나무랄 데 없이 적합한 곳이다. 소나무가 많은 흙길을 따라 하산하는데 수덕사의 쇠북소리는 잔잔한 울림으로 산을 진동시킨다. 

 

 

때 / 초가을

곳 / 주차장 – 수덕사 매표소 - 일주문 - 수덕사 - 사면 불상 - 미륵불 입상 - 만공탑 - 덕숭산 - 원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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