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강 / 홍천강을 내려보며 걷는 팔봉산
외유내강의 작은 거인, 홍천 팔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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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영의 부크크 커뮤니티
장순영은 이러한 책들을 집필, 발행하였습니다. <장편 소설>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야베스,2004년) 대통령의 여자 1, 2권(중명출판사, 2007년) 아수라의 칼 1, 2, 3권(도서출판 발칙한 상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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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서면에 소재한 팔봉산八峰山은 대부분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봉우리를 스릴을 맛보며 올라 홍천 일대의 산들과 아래로 홍천강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라 자주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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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강은 홍천군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북한강 제1지류이자 한강의 제2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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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 마곡, 밤골유원지 등 강줄기 곳곳에 오토캠핑을 할 수 있는 유원지가 숱하게 조성된 수도권 최적의 물놀이 관광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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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 아래로 홍천강이 흐르지 않았다면 팔봉산과 홍천강은 둘 다 그 이름값을 떨어뜨렸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랬다면 붓과 캔버스처럼, 혹은 젓가락 두 짝처럼 반드시 둘이 함께 존재해야 함에도 하나만 멀거니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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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같이 있어야 하는데도 하나가 자기 짝을 두고 나 몰라라 훌쩍 사라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여기 산과 강의 다감하고도 애틋한 조화로움을 보면서 그랬던 적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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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올라와서 내려가기가 꺼려지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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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143km의 홍천강, 흐르는지 멈췄는지 모르게 고요히 움직이는 물살을 역시 소란스럽지 않게 여덟 봉우리가 어깨동무하고 내려다본다.
그다지 높지 않은 팔봉의 아기자기 이어진 모습이 한 폭 동양화를 펼쳐놓은 것처럼 수려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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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홍천강 인근에 야영을 왔다가 8봉부터 1봉으로 산행을 하고 깊게 여운을 지니고 있던 영빈이 뜻에 맞춰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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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내려 커튼처럼 펼쳐진 팔봉산을 마주하노라면 마치 자그마한 언덕의 이음 같은 산세에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겉보기와 달리 막상 산에 들어가면 무어든 붙들지 않고는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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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 암봉과 급경사의 거친 암릉을 잔뜩 몸 낮춰 올라 홍천강을 내려다보노라면 물빛 노랗게 현기증 일다가 섞여 부는 강바람 산바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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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늘 그렇게 여운으로 남았다가 불쑥 기억 밖으로 튀어나와 다시 끌어당기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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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협곡을 지날 때마다 우아한 자태의 노송들, 그 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더욱 깊숙한 풍모의 단애. 비록 몸집 큰 산은 아니지만, 팔봉산은 전혀 궁박하지 않다. 아니 작은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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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하나하나 지날수록 명산으로서의 요소를 두루 갖춘 팔봉산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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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에서 봉우리를 넘어 검지와 중지를 세워 작은 정상석과 나란히 한다. 보는 광경마다 한 폭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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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1봉에서 올라 8봉으로 내려가든, 그 반대이든 마지막 봉우리에서는 내려가기가 꺼려진다. 아쉬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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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직전 홍천강을 비롯해 홍천의 보이는 곳을 죄다 눈에 담으려 멈춰 서게 된다. 멈춰 서서 둘러보면 저만치 가을 가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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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진다. 지는 가을, 까칠한 몸뚱이 비탈진 육신이지만 한 그루 나무라도 흘릴까 보아 부둥켜안은 모습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에 연륜 짙게 밴 부모님의 심지 넓고 자애로운 내리사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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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주고, 모두 내던지고 떠나려는 게지.
그러기에 저처럼 홀라당 나신을 드러내는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제 살을 바람에 떠억 내맡기겠나.
시린 가슴 부여안다가 젖어버린 설운 잎새
늦더위 물리치며 붉게 치장한 게 겨우 엊그젠데
어찌하다 가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고독 견디지 못해 바싹 마른 이파리 되어
애당초 이별에 불과한 게 삶이 아니겠냐고 바스락,
몸 뒤틀어 바람에 항변하다 그예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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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누워서라도 천년만년 살 거라는 마지막 욕구마저
곧 몰아칠 초겨울 삭풍이 휘감아 버리겠지.
산아, 산아!
도야하고 또 도야한 수도승처럼
그댄 어이 한결 꼿꼿하기만 한가.
붉은 정열, 노오란 요염함을 끝내 지켜주지 못하느뇨.
빛에 젖고 바람에도 젖어
윤나는 치장을 그리 쉽게 벗어던지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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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한 진리만을 고수하려 홍진紅塵의 티를 씻고
가연佳緣을 알리려 청사초롱 밝히시는가.
다 벗어 헐거워진 몸에 하얀 분칠 하려 기다리는 중이신가.
그도 아님 변화무쌍한 세월의 반복에 짜증이라도 나셨는가.
육중한 몸 푹 덮어줄 푸른 지붕이 있으니 딴 맘
품을 새가 없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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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찾는 길손들에게 뭐든 전할 작은 메시지라도
있지 않겠는가.
속절없이 지는 마른 갈잎이 가엾다는 입바른 소리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바람 그치고 햇살 숨어 어둠 내려온들 전혀
개의치 않겠지마는
지우고 또 지워도 내내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었노라고.
깔린 낙엽이 설워 속으로 속으로는 곡을 하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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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 산아!
그대 입 다물어 결코 들리지 않는 메시지, 그대 울음소리
넌지시 들을 수만 있다면 후끈 달아오르는 마음
가눌 수 없을 것 같구나.
어쩌다 그 소리 귓전을 스치기만 하더라도 머리끝 발끝까지
경련이 일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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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 산아!
이 계절은 차마 사랑 없인 살지 못할 잔인한
애모의 시절이 아니던가.
가득 꿈에 부풀었던 절정을 뒤로하며 흐르는 세월에
목이 멜 때가 아니던가.
일봉에서 이봉, 칠봉에서 팔봉, 내내 미지근한 햇빛
느릿하게 기울다가 산 그림자 길게 드리우니
그제야 물길 트였구나.
이때라, 입술 빗겨 물며 울먹이다 편하게 목 놓아도
홍천강 하류 센 물살이 감춰주누나.
때 / 초여름
곳 / 팔봉산 주차장 - 8봉 - 7봉 - 6봉 - 5봉 - 4봉 - 3봉(정상) - 2봉 - 1봉 - 매표소 -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