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7_ 옥빛 사랑, 적색 욕구

장한림 2022. 3. 22. 18:38
반응형
728x170
SMALL

절반의 삶, 절반의 죽음

 

7.

 

 

옥빛 사랑, 적색 욕구

 

스커트가 너무 짧잖아.”

 

 정후는 현주의 드러난 다리 때문에 눈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았다. 정후는 현주가 본사로 출장을 왔을 때도 가끔 그녀의 튀는 옷차림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막상 허벅지가 드러나는 차림으로 옆자리에 앉으니 당혹스러웠다.

 

본사에 패션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후는 시동을 걸면서 한 번 더 툴툴거렸다.

 

 “이 정도가 어때서요. 예쁘게 하고 가면 좋죠, !”

 

 오정태 전무가 부산에 왔을 때 서면의 T백화점에서 직접 골라준 투피스였다. 처음으로 입고 외출하는 차림이다. 스커트 길이가 짧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오 전무가 사준 옷을 입고 이정후 차장의 차에 함께 탔다는 게 맘에 걸리긴 했다.

 

 “차장님은 앞만 보고 운전하시면 돼요. 후후!”

 

 차 안에 향수와 샴푸 냄새가 가득했다.

 

향수까지 뿌린 거야?”

 

 한 번 코를 비튼 정후가 창문을 내리며 푸념했다.

 

 “안 좋으세요?”

 “난 머릿기름하고 향수 냄새를 제일 싫어한단 말이야. 어휴, 머리 아파.”

 “죄송해요.”

 “다음부터 내 차 타려면 그딴 거 뿌리지 마.”

 

 - ! 매너하고는, 일부러 좋은 거로 골라 뿌렸는데.

 

 현주는 그래도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부산공장에 출장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정후 차장과 동행하게 됐다. 현주는 그와 함께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와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토요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구간별로 보수하는 지역을 빼고는 한산한 편이었다. 그가 앞차들을 속속 추월했다. 조용히 음악을 듣던 현주가 입을 연다.

 

 “원래 여자랑 둘이 있으면 이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갑작스러운 현주의 말에 정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랑? 나 참, 기껏 말한다는 게 고작

 “너무 말씀이 없으셔서요. 흥분하지 마세요.”

 “흥분이라니? 내가 흥분했단 말이야, 지금?”

 “저보다도 더 불편스러워하시는 거 같아요.”

 “천만에.”

 “긴장하시는 것도 같고.”

 “얼씨구!”

 “우리, 담배 피우면 안 돼요?”

 “우리? 담배? 점입가경일세.”

 

 현주는 눈을 깜박이는 거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김현주씨가 나하고 맞담배 피울 군번이야?”

 

 현주가 담배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후는 더욱 담배를 자제하고 있었다. 정후의 대꾸에 아랑곳없이 현주는 두 개비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하나를 정후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무례하게 굴어서.”

 “전혀 죄송한 모습이 아닌데?”

 

 하는 수 없이 담배를 받아든 정후는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내렸다. 현주는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정후가 한마디 툭, 던진다.

 

 “김현주씨는 연구대상이야.”

 “왜요?”

 “무언가 비밀이 가득한 느낌이 들거든. 옛소련의 크렘린처럼.”

 

  농담처럼 가볍게 말한 정후의 한 마디가 현주의 가슴을 따끔하게 찔렀다.

 

 “연구하고 나면 실망하실 걸요.”

 

 현주는 바깥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작은 소리마저 말미를 흐렸다. 분명히 농담으로 한 말일 텐데도 현주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럴 것 같아서 연구하고 싶지 않거든.”

 “그럴 것 같다니요?”

 “겉으로 튀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내면은 지극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지.”

 “쉽게 말하면,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거죠?”

 “흐흐흐, 오버해서 해석하지는 마.”

 “그게 그거 아녜요? 겉보기와 달리 속은 텅 비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차장님은 여자 기분 맞추는 데는 아주 둔하신가 봐요. 처음부터 옷차림에, 향수에 트집만 잡고.”

 “여자 기분? 하하하!”

 “여자란 생각이 안 드신다?”

 “여자로 대우받고 싶어?”

 

 정후는 고개를 돌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현주는 입술을 잔뜩 삐죽였다.

 

 “여자를 애들 취급하시면 큰 결례인 거 모르세요?”

 “푸하하하!”

 

 정후는 큰소리로 웃어넘기고 말았다. 현주가 표정을 풀면서 물었다.

 

 “사귀는 분은 없나요?”

 “사귀는 사람이라.”

 “결혼을 생각하실 때잖아요.”

 “후후후!”

 

 대답 없이 굽은 도로를 유연하게 회전시키는 정후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다가 현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함께 여행을 해보니까 알겠네요.”

 “?”

 “일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있으시네요. 일하실 때 느끼는 분위기와 또 다른 멋이 풍겨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차장님을 좋아하나 봐요.”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군.”

 

 일할 때 느끼는 강한 카리스마와 대조적인 정후의 부드러움이 현주에게 성큼 와 닿았다. 이중적이지 않은 양면적 장점을 그에게서 보게 된다.

 

 “차장님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으세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이 나이에 사랑도 안 해봤을 거 같아?”

 “차장님은.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데요. 호호! 무시하는 건 아녜요.”

 “보기와 다르게 사람 염장을 지르는 재주가 있네.”

 “어떻게 보면 나무토막 같고, 어떻게 보면 바람둥이 기질이 엿보이기도 하고. 판단하기가 모호해서 저도 물은 거였거든요. 호호호!”

 “김현주! , 오늘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나무토막? 바람둥이?”

 

 정후는 손바닥으로 핸들을 탁, 탁 두 번 두들겼다.

 

 “죄송해요. 전 조금 가깝다 싶으면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습관이 있걸랑요.”

 “꼬박꼬박 말은 잘 받아치는군.”

 

 정후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물었다.

 

 “가까워진 것 같아? 나랑?”

 “저만 그런 건가요?”

 “하하하! 알다시피 난 누구하고든 다 가까워.”

 

 연수교육을 마친 그날,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서 그의 친구들은 정후가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했었다. 현주는 정후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특별히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하하하! 집요한 면이 있네. 엉뚱한 면도 있고.”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대학 시절, 잠시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있었다. 입학 동기인 유지혜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외로움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귀하게 자란 첫딸이 가난한 고아와 사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혜가 거리를 두려는 걸 알고 고시원에 파묻혀 지냈다.

 다시 고독의 딜레마에 빠지는 건 지긋지긋한 일이었기에 툭툭, 먼지 털듯 속을 비워냈다. 고독을 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책에 매달리는 거였다. 공부할 때만큼은 세상이 평등했다. 유일하게 불행을 떠올리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바로 공부였다.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즉시 입대했다.

 그 후, 현주의 물음이 뜻하는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 없었다.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여분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정후는 현주의 물음에 털털한 웃음으로 비켜 가며 카 오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맞춰 핸들을 토닥거렸다.

 

 “! 재미없어라.”

 “현주 남자친구는 뭐 하는 사람이?”

 “?”

 “놀라긴.”

 “, !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고, 그냥 직장 다니는 평범한.”

 

  현주는 느닷없는 정후의 질문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굉장히 사랑하나 보지? 이렇게 매번 서울까지 찾아가서 만나나?”

 “…….”

 “현주가 마음을 준 사내라면 꽤 그럴듯한 사람일 거야. 하하! 그렇지?”

 

 정후가 웃음까지 섞어가며 가볍게 물었으나 현주는 가볍게 대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에 익숙하지도 않았거니와 그와의 대화에 정태가 거론되는 것이 적어도 지금 이 차 안에서만큼은 감내하기 어려웠다. 서울까지 동승하면서 직장상사와 부하 여직원 간의 서먹한 벽을 겨우 허무는가 싶었는데 정후는 터부시해야 할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의도가 없는 물음이었겠지만 잠시 하늘로 오를 것 같던 기분이 일순간에 사그라졌다.

 다행히 그는 길게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 이름 모를 들꽃이 길게 늘어서 있다. 침묵이 어색해서였을까. 현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미혼인 사람이 가정이 있는 상대와 교제한다면어떻게 생각하세요?”

 

 

반응형
그리드형
LIST